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 주역으로 활약했던 박지성과 이천수. 황선홍과 홍명보의 'H-H 라인'에 이어 한국 축구의 10년을 짊어질 스타로 떠올랐던 이들의 8년 뒤 행보는 그야말로 극과 극 입니다. 한 선수는 세계적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으로 뛰고 있지만 또 한 선수는 져니맨인데다 얼마전 임금 체불 문제로 소속팀을 떠났습니다. 전자는 한국 대표팀 주장이지만 후자는 대표팀 명단 발탁 때 마다 고배를 마셨습니다.
박지성의 무한 발전은 참으로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이천수의 몰락이 씁쓸합니다. 10년 전 청소년 대표팀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며 '밀레니엄 스타'로 떠올랐던 이천수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수 본인의 재능만을 놓고 보면 유럽에서 충분히 통했을 것이며 지금쯤 허정무호의 에이스로 이름을 떨쳤을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울산-페예노르트-수원-전남-알 나스르에서 활약했던 행보만을 놓고 봐도 축구 선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알 나스르에 이어 또 다른 팀을 찾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천수는 지난해 7월 전남과 갈등을 빚은끝에 사우디 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프로축구 팀인 알 나스르에 입단했습니다. 하지만 알 나스르에서 8개월 동안 사이닝보너스를 지급받지 못한 것을 비롯 총 8억원의 임금을 체불당한 끝에 얼마전 귀국했습니다. 이천수는 그동안 구단 수뇌부에게 돈을 달라는 요구를 수없이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심지어 사우디 프로축구연맹과 사우디 축구협회까지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여권을 얻어 국내에 귀국했지만, 알 나스르가 아직 잔여 경기를 더 치러야 하기 때문에 무단 이탈로 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이천수와 알 나스르의 계약 종료는 올해 6월 말)
사우디를 떠난 이천수는 새로운 소속팀을 찾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초 K리그에서 임의탈퇴로 공시되었고 그 권한을 쥐고 있는 전남이 임의탈퇴 해제에 강경한 반대를 취하면서 국내의 어떤 팀과 계액을 맺고 뛸 수 없습니다. 중국 슈퍼리그는 이미 선수 등록 기한이 지났고 일본 J리그는 선수 등록이 3월말에 마감되지만 이미 많은 팀들이 외국인 선수 쿼터를 채웠습니다. 하지만 수원-전남-알 나스르와의 이별이 매끄럽지 못한것을 비롯 그라운드에서 말썽을 피우며 물의를 빚었던 이천수를 J리그 클럽들이 받아줄지는 의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라운드를 밟지 못할 것입니다.
이천수의 사우디 진출은 어떠한 명분과 실리가 없었습니다. 사우디 진출 그 자체가 선수의 커리어 향상 및 유럽 진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고액 연봉을 얻기 위해 중동으로 떠났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8억원의 막대한 임금 체불 이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소속팀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축구 선수에게 있어 소속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축구 선수는 경기를 뛰어야 실전 감각을 익히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데 이천수에게 그런 기회가 빠른 시일내에 열릴지 의구심이 듭니다.
결국, 이천수가 전남과 대립하면서 사우디에 진출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이천수 본인이 스스로 자초했던 결과입니다. "페예노르트가 연봉 9억원보다 많은 돈을 원하는 구단이 있으면 이적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조항을 페예노르트의 양해를 얻어 자의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사우디 진출을 위한 전남과의 논의 및 절차를 무시하며 에이전트와 함께 언론 플레이까지 일삼았던 이천수의 행동은 축구팬들의 지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남으로부터 임의탈퇴 공시 되었고 K리그 구단 단장들까지 이천수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이천수 행보가 실망스러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박항서 전남 감독에 대한 도의를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천수는 전남 시절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항서 감독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한것을 비롯 모 방송국 토크쇼(백지연이 진행하는 프로)에서는 박항서 감독에게 영상편지를 띄우기도 했습니다. 2008년 연말 수원에서 임의탈퇴 공시를 받아 자칫 2009시즌 그라운드를 밟지 못할수도 있었던 이천수를 벼랑끝에서 구원했던 사람이 박항서 감독 이었기 때문이죠. 만약 박항서 감독이 없었다면 이천수의 축구 인생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천수가 지난해 3월 주먹감자 파문으로 6경기 출전 정지 및 페어 플레이 기수 징계를 받았을 때, 박항서 감독은 선수 관리 부실로 전남 구단에 벌금 100만원을 지불 했습니다. 그럼에도 박항서 감독은 이천수의 재기를 믿었고, 제자는 스승의 기대속에 징계를 마치고 K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허정무호 발탁 여부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천수는 박항서 감독에게 배신을 안기고 무리수를 감행하며 사우디로 떠났습니다.
이천수 입장에서 사우디 진출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죠. 유럽 진출을 앞두던 2007년 8월 어느 모 중견 기업인에게 돈을 빌려줬으나 그 기업인이 이자마저 갚지 않아 운동을 제대로 병행할 수 없었고 시즌 도중 국내에 귀국해 돈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돈이 자신의 전 재산이었기 때문이죠. 국내 여론은 이천수의 돌연 귀국 이유를 향수병으로 진단했지만 추측에 불과했습니다. 돈이 없었던 이천수는 스트레스로 마음 고생에 시달린 끝에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사우디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8억원 임금 체불을 당하고 국내에 돌아오면서 상황이 더 어렵게 됐습니다.
물론 이천수가 전남에서 뛰기에는 여건이 좋지 못했습니다. 전남과 연봉 2억 5천만원 계약을 지난해 6월 중순에 사인했고 그 이전까지 무일푼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이천수가 전남을 떠날 당시 "전남과 계약하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했던 것 처럼, 전남은 이천수에게 고액 연봉을 안겨 줄 수 있는 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천수가 사우디 진출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고 전남에 잔류했다면 더 이상의 난처한 상황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고액 연봉에 익숙했던 이천수에게는 전남의 여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돈이 아닌 미래였습니다.
만약 이천수가 2009시즌 전남에 계속 잔류했다면 시즌 종료 후 두둑한 연봉을 안겨주는 팀으로 떠났을지 모릅니다. 자신을 받아준 박항서 감독과 함께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면 올 시즌에도 전남에서 뛰었겠죠. K리그는 이천수 효과에 힘입어 흥행 성공의 돌파구를 마련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천수는 지금쯤 허정무호에서 박주영(또는 이동국)의 투톱 파트너로 뛰었거나 아니면 이청용의 경쟁자로 활약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남아공 월드컵 각오를 듣기 위해 언론사들에게 수없이 인터뷰 요청을 받겠죠. 사우디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2010년 3월을 보내는 이천수의 발걸음이 가벼웠을지 모를 일입니다.
By. 효리사랑 (트위터 : bluesoccer)
-관련 글-
1. '강팀 킬러' 박지성의 축구 지능은 최고였다
2. FIFA의 월드컵 응원 문화 규제는 부당하다
3. 수원삼성, K리그-ACL 동시 우승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