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유상철의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그라운드 이곳 저곳 몸을 불사르며 뛰어다니는 투지가 대단하기 때문이죠. 어느 포지션을 소화하든 체격 조건 좋은 서양인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로 상대를 꺾겠다는 각오가 투철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라커룸에서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마도' 지금의 박지성보다 더 많이 뛰었을 겁니다.

유상철은 현역 시절에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한 선수로서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습니다. 파이터형 기질의 미드필더로서 항상 상대팀 공격형 미드필더들을 곤혹스럽게 했죠. 수비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적극적인 전방 침투로 상대 중앙 수비를 한꺼풀씩 벗겨내며 동료 선수들에게 많은 골 기회를 주더니 경기 상황에 따라 자신이 직접 골을 해결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상철에 필적할 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대표팀에 등장했습니다. 4-4-2를 쓰는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 중앙 미드필더가 맞습니다만, '조투소' 조원희(26, 위건)가 유상철의 레벨에 근접할 수 있는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저돌적이고, 수비력이 능하고, 박스 투 박스 스타일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죠. 스타일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대표팀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앞으로 유상철의 역할을 계속 소화할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사실, 유상철 만큼의 수비 진가를 뽐낼 젊고 유능한 인재는 국내에서 보기 드뭅니다. 불과 200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하더라도 김남일-김진우-김상식 같은 투철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K리그 3대 수비형 미드필더로 군림하며(김기동은 부천에서 멀티로 뛰었기 때문에 이들과는 다른 대열에 있었죠.) 유상철과 흡사한 디펜딩을 자랑했지만, 요즘에는 이와 비슷한 선수들이 K리그는 물론 대표팀에서도 줄었습니다. 파이터형이 아닌 기술적이고 깔끔한 패스워크를 자랑하는 중앙 미드필더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원희가 이들과 다른 색깔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조원희는 '조투소(조원희+가투소)'라 불릴 만큼 황소처럼 저돌적인 기질을 갖췄습니다. 박스 투 박스 유형의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자기 편 박스와 상대 편 박스를 활발히 넘나드는 엄청난 활동량과 빠른 순발력을 지닌 선수죠. 악착같은 수비로 상대팀 선수들의 공격을 무너뜨리며 허리싸움에서의 주도권을 손쉽게 장악하는 유형인데, 그 과정에서 역습을 전개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중거리슛을 날리며 상대팀의 골문을 위협했습니다.(전반적으로는 슈팅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그만큼 체력이 강하다는 것인데 유상철의 경기력을 떠올리게 할 정도죠.(다른 점이라면, 유상철은 남보다 더 먼저 움직이려는 유형이고 조원희는 스피드가 타고난 선수죠.)

그런데 조원희는 대표팀의 확고한 주전 선수가 아닙니다. 허정무 감독이 김남일에서 기성용 중심의 중원 체제를 구축하면서 김정우가 기성용의 단짝으로 중용되는 것이죠. '김정우-기성용' 조합은 이전 미드필더진에 비해 경기 스타일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편입니다. 아시아 최종예선까지는 한국과 수준이 비슷하거나 떨어지는 아시아 팀들과의 대결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 중원을 제압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본선 체제로 돌입하면 허정무호의 중원이 흔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이 상태로 '김정우-기성용' 조합을 내놓기에는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대표팀 중앙 수비가 취약한 상황에서 김정우-기성용의 수비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데, 강팀과 그외 수준급 팀들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김정우-기성용 조합이 중용되는 이유는 베이징올림픽과 허정무호에서 안정된 호흡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기성용이 팀의 공격이 원활하게 풀릴 수 있도록 매끄럽게 경기를 운영하려면 김정우처럼 공간 이해가 뛰어난 선수가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수비력에서 한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성용이 수비 과정에서 활동폭을 넓게 움직이지 못하면서 상대팀에게 공간 허용의 위험을 안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실점으로 연결되지 않으려면 김정우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앵커맨 출신의 선수여서 그런지 활동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또한 김정우는 피지컬이 좋은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팀 선수와 대결하기가 힘이 듭니다.(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허정무 감독이 중원 문제 때문에 언젠가 4-3-3으로 전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강팀을 상대로 김정우-기성용의 4-4-2가 통할지는 의문입니다.)

문제는 김정우-기성용 조합을 대체할 선수들 중에 대부분의 스타일이 고만고만하다는 겁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김정우와 중앙 미드필더를 맡았던 김두현을 비롯해서 김치우, 하대성, 박현범의 스타일이 서로 비슷한 유형이죠.(이 부분은 예전부터 축구 현장에서 나왔던 지적이죠. 똑같은 선수들이 계속 배출되는 현상 말입니다.) 파이터형 중앙 미드필더 중에서는 조원희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조원희의 스타일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표팀에서는 예전의 유상철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대표팀에서 희소가치가 크다는 것이며 허정무 감독이 계속 발탁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원희가 예전의 유상철 처럼 중원의 핵이 되려면 공격력을 길러야 합니다. 조원희는 전방을 향해 띄워주는 전진패스에 약한 편이어서 대표팀의 효율적인 공격 전개에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동력 혹은 측면쪽으로 향하는 역습 형태의 패스로 이를 커버했지만 더 나은 선수가 되려면 전방쪽으로 과감히 공격을 전개하면서 패스 정확도를 키워야 합니다.

물론 유상철도 패스가 좋았던 선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잦은 패스 미스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 기회를 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그럼에도 조원희의 패싱력이 늘어야 하는 이유는 포지션 경쟁 상대가 김정우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우가 대표팀의 주전으로 등용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스루패스와 종패스를 통해 팀의 공격을 띄우는 성향인데 패스 정확도는 국내에서 톱클래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공격 전개 만큼은 기성용보다 더 노련하기 때문에 허정무 감독이 수비력 약화를 감안하더라도 주전으로 기용하는 것입니다. 고려대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선수였기 때문에(당시 나카무라 슌스케와 비슷한 성향이어서 비교가 많이 되었죠.) 공격력에서는 나무랄게 없었죠.

그러나 조원희가 오른쪽 풀백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환한지 2년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발전 속도가 빠른 겁니다. 비록 올해는 부상등을 이유로 많은 경기에 뛰지 못했지만, 선수 본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놓고 보면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원희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유상철과의 경기력이 비슷한 이점이 있기 때문에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선수입니다. 조원희가 잘해야 대표팀의 중원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p.s : 이 글에서 이호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울산 시절에 비해 경기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니트에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여파 때문에 예전의 장점을 잃었더군요. 현재 부상중인 김남일의 대표팀 발탁 가능성은 사실상 어려워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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