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서 '진공청소기' 김남일(32, 빗셀 고베)의 존재감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대표팀 엔트리에서 제외되더니 이제는 언론에서 언급하는 대표팀 발탁 예상 후보조차 거론되지 못할 정도입니다. 최태욱을 비롯해서 이동국-이천수-조재진-최성국 같은 올드보이들의 이름만 알려질 뿐이죠. 더욱이 대표팀 주장은 박지성 체제로 자리잡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중원에서도 김남일의 흔적은 없어졌습니다. 허정무호는 지난해 10월부터 김남일이 중심이었던 4-3-3에서 벗어나 '기성용-조원희(김정우)' 콤비가 짝이 된 4-4-2로 변신한 끝에 지금까지 납득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김남일 체제에서 연이은 졸전을 거듭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최근에는 중앙 미드필더 주전 경쟁에 김치우까지 가세하는 모양새인데다 하대성, 박현범, 정훈 등등 젊고 패기 넘치는 미드필더 자원들까지 새롭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김남일의 대표팀 제외는 세대교체의 일환입니다. 허정무 감독은 김남일을 엔트리에서 제외한 이후부터 젊은 선수들에 대한 비중을 늘리더니 이제는 유병수-양동현-김근환 같은 A매치 경력이 없는 영건들까지 대표팀에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대표팀 25인 명단에서 30대 선수가 2명(이운재, 이영표)에 불과할 정도로 말입니다. 전술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지난 2월 13일에 <김남일, 대표팀에서 길을 잃은 이유는? ( http://bluesoccer.net/499 )>이라는 글을 올렸던 것 처럼, 허정무호의 전술적인 변화는 김남일을 제외한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여론에서는 '그래도 김남일의 홀딩 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팀에 뽑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만 선수 선발 권한을 쥐고 있는 허정무 감독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더욱이 그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허 감독의 시나리오가 점점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김남일은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만약 허정무호의 성적이 지금까지 계속 좋지 않았다면, 김남일 대표팀 발탁에 대한 여론의 목소리는 커졌을것이 분명합니다. 김남일은 어쩌면 2~3년전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여러차례 이름을 내밀지 못했던 데이비드 베컴과 똑같은 행보를 걸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베컴도 세대교체의 일환으로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에 의해 엔트리에 제외되었으니까요.

김남일과 베컴은 각각 허정무호 초기 시절과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던 팀의 상징입니다. 전술적으로도 두 선수의 팀내 무게감은 컸습니다. 허정무호에서는 김남일의 존재 유무에 따라 팀 전술이 오락가락했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2001~2006년까지 스반 예란 에릭손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오랫동안 베컴 중심의 공격 전술을 표방 했습니다. 당시 맥클라렌 감독은 에릭손 체제에서 수석코치 역할을 맡았지요.

그러던 맥클라렌 감독은 자신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이후부터 팀 전술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 베컴을 과감히 내쳤습니다. 베컴 자리에 여러명의 선수들을 시험하여 전술을 운용했던 것이죠. 허정무 감독도 그랬습니다. 김남일을 제외하면서 기성용 중심의 중원 라인을 구축했고 김치우와 하대성까지 중원 주전 경쟁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두 감독의 결과는 엇갈렸습니다. 맥클라렌 감독은 연이은 졸전으로 현지 여론으로부터 "베컴을 기용하라"는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유로 2008 예선 후반부에 이르러 베컴을 마지못해 기용했지만 그 타이밍이 늦다보니, 유로 2008 본선 진출 좌절 이후 30분 만에 경질 되었습니다. 반면 허정무호는 김남일을 제외한 이후부터 전술을 비롯해서 세대교체, 선수단 분위기 등등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업그레이드에 성공했습니다. 김남일을 대체할 자원을 만들기 보다는 4-3-3에서 4-4-2로 바꾸면서 홀딩맨의 비중을 줄였죠. 오히려 기성용 중심의 경기 장악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김남일과 베컴의 경기 스타일도 희비를 엇갈리게 했습니다. 우선, 베컴이 올해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었던 원인은 젊은 윙어 자원들의 스타일과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오 월컷과 데이비드 벤틀리, 숀 라이트-필립스는 빠른 발을 주무기로 하는 돌파형 윙어입니다. 하지만 베컴은 양질의 크로스를 비롯해서 세트피스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감독 입장에서도 돌파형 윙어를 2명 놓는 것 보다 각각 스타일이 다른 선수를 좌우 측면에 한 명씩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거란 판단이 들었죠. 그래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베컴을 중용하는 것입니다.

반면 김남일은 조원희의 홀딩 스타일과 비슷합니다. 두 선수 모두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물고 늘어뜨리는 스타일 이니까요. 이는 조원희가 2007년 여름에 오른쪽 풀백에서 홀딩맨으로 전환하면서 당시 팀 동료였던 김남일의 장점을 빠르게 읽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패스는 김남일이 단연 우세이지만, 조원희는 자신의 패스 정확도 부족을 넓은 활동량(김남일의 단점)으로 커버하는 영리한 경기 운영을 했습니다. 특히 4-4-2는 활동량이 넓고 부지런한 미드필더들이 유리하기 때문에 조원희가 김남일보다 더 유리했던 것입니다. 이는 2008시즌 더블 우승을 차지했던 수원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김남일이 빠지고 조원희가 중원의 축이 되면서 4-4-2로 전환하더니 값진 실적을 올렸던 것이죠.

김남일이 베컴처럼 대표팀에 합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얼마전 대퇴부 파열로 전치 2개월의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죠. 부상 후유증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내년 월드컵 본선에 뛰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그는 '한국판 베컴'이 되지 못했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잉글랜드 팬들에게 최악의 감독으로 찍힌 맥클라렌 감독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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